JEEMIN KIM
프로토타입 템플 (Prototype Temple)
이 땅에 세워지는[1] 템플(temple)은 작가의 성역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마치 극(劇) 처럼 막을 올리고 또 소멸하고 매번 다른 모습으로 회귀한다.
프로토타입 템플(Prototype Temple)은 “침묵의 선(Line of Silence)”회화와 “움직이는 샹들리에(Moving Chandelier)”설치를 융합한 토탈 인스톨레이션(Total Installation)으로, 전시 단위로 생성되고 그 뒤에 붙은 부제를 변화시키며 다른 무대를 구성하고 종료한다. 전시가 시작하고 닫히는 모습에서 또한 열리고 소멸하는 공연을 연상하였고, 무대에서의 열광과 허무에 대한 교차 경험을 기억하였다. 작가는 마치 연극 무대와 같은 가상의 템플을 세우는데, 이는 본인의 오랜 음악 활동에서 기인한 무대의 휘발성과 그에 수반되는 극치極致감정에 대한 향수를 대변한다. (‘극치極致감정’은 조악한 번역체의 느낌을 내기 위해 최근 지어낸 말로 우리가 짧은 시간에 세월이 응축된 무대 공연에 몰입하여 경험하는 극단적인 감정이다. 만족스럽게 표현할 단어가 없어 마치 외국어를 직역한 듯한 뉘앙스로 이름지었다.)
“어째서 기록된 모든 성소들은 천체의 빛이 완전히 숨어 버린 장소에서, 대지 아래의 암흑과 심연이 전적으로 군림하는 곳에서 첫발을 내딛는가?”[2]
프로토타입 템플은 어두운 밤에 방문한 특정한 장소로서, 고전, 신화, 고고학 등 여러 주제를 융합해 공연을 연상시키는 형태로 제작된다. 프로토타입 템플이라는 극(劇)에서 회화 “침묵의 선” 시리즈를 무대 배경으로 삼고 “움직이는 샹들리에”가 주연 배우로서 움직이게 된다. 첫 개인전 <Prototype Temple: At Night>(2021)은 특정한 주제의식을 갖기보다 앞으로 밤을 무대로 생성될 템플들에 대한 개관이자 소개의 장이었다. 장소의 특성을 고려하여 가상의 공간 안에 다국적 고전의 모습이 교차되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시너지와 의외의 가능성을 시도해 보는 것에 그 의도가 있다.
극劇에서 우리는 짧은 시간에 응축된 세월을 관람함으로서 현실과 분리된 극한의 감정을 체험하는데 이에 대한 설명을 파스칼 키냐르의 <꽃들을 죽이기>의 몇 구절에 빗대어 이야기 하려 한다.키냐르는 꺾여진 꽃은 일종의 ‘응축된 kairos(때)’라는 이야기를 하며 꽃이 소비되는(만개하고 빠르게 낙화하는) 시간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일종의 ‘돌연한 극심한 개화’입니다. 불시에 덮쳐 경탄을 불러 일으키는 감동 (중략)…심장을 관통하는 무엇 (중략)…종지부를 찍는 ‘너무 이르게’. (중략)…압축된 극소화 상태의 시간이에요.
(중략) …갑자기 순간적으로 가능해진 ‘강렬한 조기 결실’ (중략)… 시간의 범위를 밤의 밖으로, 그리고 낮의 밖으로, 기이하게 확장하기 위해 시간에서 솟아오른 비시간. 시간의 단축으로서의 이러한 시간”[3]
키냐르가 꽃을 죽이는 과정은 템플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극의 모습과 그 본질이 흡사하다. ‘시간의 단축’으로서 돌연한 극심한 개화, 심장을 관통하는…너무 이르게 종지부를 찍는…압축된 극소화 상태의 시간.
그리고… 극(템플)에서 나오는 순간의 공허, 휘발되는 감정에서 마치 신기루를 본 듯한. 그리움을 느낄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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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된 질문이 한 가지 있다. 경험한 적 없는 고전 취미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왜 그곳에서 가치를 찾는 것일까. 나는 지나간 자들의 문명으로부터 일종의 서글픈 향수(nostalgia)를 느낀다. 오래된 것 만이 내 심장을 뛰게 했다. 이국적인(exotic)감상과 향수(nostalgia)경험이 어떠한 관계로 이어져 양가적 숭고를 일으키는 것일까? 혹시 현대인의 고전 취미는 포스트 모더니즘 이전 거대 서사에 대한 향수로부터 비롯[4]되었을까.
그 해답을 오래 고민 해 왔지만 결론이 나지 않을 것임을 안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시간에 대한 오래된 향수를 무엇으로 설명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감정이라는 것은 이름을 붙일 때 그 형태가 명확해지는 것이다. 나는 지나간 문명을 마주하는 경외와 슬픔을, 탄식을, 양가감정을, 숭고, 황홀경(ecstasy), 슬픔, 그리움 등 여러 이름으로 불러왔으나 이 모든 것이 그를 정확히 지시하지 못하였고, 이제 조금은 은유적인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이 감정은 그 자체로 오랜 세월을 존재한 느낌이다.
“대체 어느 장소와 어느 시간에 행복(la Laetitia)을 경험했기에 그 기억을 지니고 있으며, 언제나 변함없이 행복의 욕망을 강렬하게 느낀단 말입니까?…”[5]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이다. 그는 경험하지 못 한 감정을 기억하고, 강렬히 욕망하고 있었다.
이 오래 된 감정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마치 고대부터 존재 한 것 같은 그런 감정 말이다.
우리의 유전자는 고대의 기억[6]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감정은 그 기억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것은 실제로 오래 된 감정이기 때문에 낡고, 그 형태가 희미하고(해상도가 떨어지듯)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고, 누렇고, 육중하다. 지나간 사람들의 문명을 볼 때 슬프다는 것.
그 슬픔이 향수(nostalgia)와 닮았다는 것.
이것은 ‘오래된 감정’이다. 이것은 화석처럼 우리 안에 육중하게 굳어진, 고대부로부터 우리의 뼛 속에 새겨진 기억이다. 최초의 감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을 우리는 기억 하고 있을까? 너무 오래 되어서 실체를 알아보기 힘든 오래된 감정만이 남았을 뿐이다. 그들 죽은 자들은 말이 없기에 고대의 기억은 침묵한다.
이 ‘오래된 감정’은 템플(Prototype Temple) 안에서 ‘극치 감정’으로서 구현되는데,
그것은 ‘시간의 단축’, ‘돌연한 극심한 개화’, ‘너무 이르게 종지부를 찍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1] 친구 혜주의 전시 감상에서 가져온 표현이다. “…앞으로 작가 김지민이 이 땅 위에 세우고자 하는 수많은 Temple의 예지적 지표요 그 곳으로 나아갈 통로의 입구”.
[2] 파스칼 키냐르, 음악 혐오
[3] 파스칼 키냐르, 하룻낮의 행복
[4] 메타서사가 청산 되었기 때문에.
“모더니티의 기획은 …… 버려지고 잊혀진 것이 아니라, 파괴되고 ‘청산되었다.’”, Jean-François Lyotard, Apostil on Narratives (1992 : 18)
[5]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10권 23장
[6] 우리 사피엔스의 여러 유전적 특질에서
김지민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