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test update : 25 01 2022

프로토타입 템플 (Prototype Temple)

 

 

이 땅에 세워지는[1] 템플(temple)은 작가의 성역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마치 극() 처럼 막을 올리고 또 소멸하고 매번 다른 모습으로 회귀한다.

 

프로토타입 템플(Prototype Temple)은 “침묵의 선(Line of Silence)”회화와 “움직이는 샹들리에(Moving Chandelier)”설치를 융합한 토탈 인스톨레이션(Total Installation)으로, 전시 단위로 생성되고 그 뒤에 붙은 부제를 변화시키며 다른 무대를 구성하고 종료한다. 전시가 시작하고 닫히는 모습에서 또한 열리고 소멸하는 공연을 연상하였고, 무대에서의 열광과 허무에 대한 교차 경험을 기억하였다. 작가는 마치 연극 무대와 같은 가상의 템플을 세우는데, 이는 본인의 오랜 음악 활동에서 기인한 무대의 휘발성과 그에 수반되는 극치極致감정에 대한 향수를 대변한다. (‘극치極致감정’은 조악한 번역체의 느낌을 내기 위해 최근 지어낸 말로 우리가 짧은 시간에 세월이 응축된 무대 공연에 몰입하여 경험하는 극단적인 감정이다. 만족스럽게 표현할 단어가 없어 마치 외국어를 직역한 듯한 뉘앙스로 이름지었다.)

 

“어째서 기록된 모든 성소들은 천체의 빛이 완전히 숨어 버린 장소에서, 대지 아래의 암흑과 심연이 전적으로 군림하는 곳에서 첫발을 내딛는가?”[2]

 

프로토타입 템플은 어두운 밤에 방문한 특정한 장소로서, 종교, 고전, 고고학 등 여러 주제를 융합해 공연을 연상시키는 형태로 제작된다. 프로토타입 템플이라는 극()에서 회화 “침묵의 선” 시리즈를 무대 배경으로 삼고 “움직이는 샹들리에”가 주연 배우로서 움직이게 된다. 첫 개인전 <Prototype Temple: At Night>(2021)은 특정한 주제의식을 갖기보다 앞으로 밤을 무대로 생성될 템플들에 대한 개관이자 소개의 장이었다. 장소의 특성을 고려하여 가상의 공간 안에 다국적 고전의 모습이 교차되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시너지와 의외의 가능성을 시도해 보는 것에 그 의도가 있다. 

 

에서 우리는 짧은 시간에 응축된 세월을 관람함으로서 현실과 분리된 극한의 감정을 체험하는데 이에 대한 설명을 파스칼 키냐르의 <꽃들을 죽이기>의 몇 구절에 빗대어 이야기 하려 한다.키냐르는 꺾여진 꽃은 일종의 ‘응축된 kairos(때)’라는 이야기를 하며 꽃이 소비되는(만개하고 빠르게 낙화하는) 시간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일종의 ‘돌연한 극심한 개화’입니다. 불시에 덮쳐 경탄을 불러 일으키는 감동 (중략)…심장을 관통하는 무엇 (중략)…종지부를 찍는 ‘너무 이르게’. (중략)…압축된 극소화 상태의 시간이에요.

(중략) …갑자기 순간적으로 가능해진 ‘강렬한 조기 결실’ (중략)… 시간의 범위를 밤의 밖으로, 그리고 낮의 밖으로, 기이하게 확장하기 위해 시간에서 솟아오른 비시간. 시간의 단축으로서의 이러한 시간”[3]

 

키냐르가 꽃을 죽이는 과정은 본인이 템플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극의 모습과 그 본질이 흡사하다. ‘시간의 단축’으로서 돌연한 극심한 개화, 심장을 관통하는…너무 이르게 종지부를 찍는…압축된 극소화 상태의 시간.

그리고… 극(템플)에서 나오는 순간의 공허, 휘발되는 감정에서 마치 신기루를 본 듯한. 그리움을 느낄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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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된 질문이 한 가지 있다. 나의 고전 취미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왜 그곳에서 가치를 찾는 것일까. 나는 지나간 자들의 문명으로부터 일종의 서글픈 향수(nostalgia)를 느낀다. 오래된 것 만이 내 심장을 뛰게 했다. 이국적인(exotic)감상과 향수(nostalgia)경험이 어떠한 관계로 이어져 양가적 숭고를 일으키는 것일까? 혹시 현대인의 고전 취미는 포스트 모더니즘 이전 거대 서사에 대한 향수로부터 비롯[4]되었을까.

 

그 해답을 오래 고민 해 왔지만 결론이 나지 않을 것임을 안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시간에 대한 오래된 향수를 무엇으로 설명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감정이라는 것은 이름을 붙일 때 그 형태가 명확해지는 것이다. 나는 지나간 문명을 마주하는 경외와 슬픔을, 탄식을, 양가감정을, 숭고, 황홀경(ecstasy), 슬픔, 그리움 등 여러 이름으로 불러왔으나 이 모든 것이 그를 정확히 지시하지 못하였고, 이제 조금은 은유적인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이 감정은 그 자체로 오랜 세월을 존재한 느낌이다.

 

“대체 어느 장소와 어느 시간에 행복(la Laetitia)을 경험했기에 그 기억을 지니고 있으며, 언제나 변함없이 행복의 욕망을 강렬하게 느낀단 말입니까?[5]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이다. 그는 경험하지 못 한 감정을 기억하고, 강렬히 욕망하고 있었다.

 

이 오래 된 감정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마치 고대부터 존재 한 것 같은 그런 감정 말이다.

 

우리의 유전자는 고대의 기억[6]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감정은 그 기억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것은 실제로 오래 된 감정이기 때문에 낡고, 그 형태가 희미하고(해상도가 떨어지듯)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고, 누렇고, 육중하다. 지나간 사람들의 문명을 볼 때 슬프다는 것.

그 슬픔이 향수(nostalgia)와 닮았다는 것.

이것은 ‘오래된 감정’이다. 이것은 화석처럼 우리 안에 육중하게 굳어진, 고대부로부터 우리의 뼛 속에 새겨진 기억이다. 최초의 감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을 우리는 기억 하고 있을까? 너무 오래 되어서 실체를 알아보기 힘든 오래된 감정만이 남았을 뿐이다. 그들 죽은 자들은 말이 없기에 고대의 기억은 침묵한다.

 

이 ‘오래된 감정’은 템플(Prototype Temple) 안에서 ‘극치 감정’으로서 구현되는데,

그것은 ‘시간의 단축’, ‘돌연한 극심한 개화’, ‘너무 이르게 종지부를 찍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1] 친구 혜주의 전시 감상에서 가져온 표현이다. “…앞으로 작가 김지민이 이 땅 위에 세우고자 하는 수많은 Temple의 예지적 지표요 그 곳으로 나아갈 통로의 입구”.

[2] 파스칼 키냐르, 음악 혐오

[3] 파스칼 키냐르, 하룻낮의 행복

[4] 메타서사가 청산 되었기 때문에. 

“모더니티의 기획은 …… 버려지고 잊혀진 것이 아니라, 파괴되고 ‘청산되었다.’”, Jean-François Lyotard, Apostil on Narratives (1992 : 18)

[5]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10권 23장

[6] 우리 사피엔스의 여러 유전적 특질에서

​김지민 25. 01. 2022

침묵의 선에 대하여…

 

내 모든 작업을 관통하는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Tractatus, 1922) 

 

“Whereof one cannot speak, thereof one must be silent.”[1]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여러 작업에 걸쳐 언어로서 음악의 우월성을 주장해 왔으나 최근 그 생각을 번복하게 되었다. 이 주장은 모두 비트겐슈타인의 ‘Unspeakable’[2]이라는 개념에서 비롯되었는데, 나는 이에 대해서 작업으로서 여러 실험을 진행 해 왔다. 목표는 비트겐슈타인의 ‘말할 수 없는 것’을 대체할 수 있는 상위 언어의 발견, 혹은 창조였다.지금껏 해왔던 실험 들에는 앞서 언급하였던 ‘Art as language(2016)’, ‘Blind orchestra(2015)’, ‘Ashes to ashes, dust to dust 시리즈 (2015)’ 등이 있었다. 위 작업들에서 나는 ‘Unspeakable’을 해결하는 상위 언어의 예로 예술 언어를 들어왔고 특히 음악 언어의 ‘언어로서’ 적합함을 주장해왔다. (음악 언어는 일상 언어와 같이 소리 표현과 쓰기, 읽기 또한 가능하기 때문에.) 따라서 음악의 이런 문법적 측면이나 언어와의 유사성을 시각언어, 즉 미술에 차용할 수 있다면 미술적 언어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 해 왔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나의 이런 실험들이 분명 의미 있는 시도였지만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Blind orchestra(2015)를 제외한 Art as language(2016)등의 작업들은 일상 언어의 기호화 혹은 유사 번역 과정일 뿐이었다.어떤 작품에서건 음악의 언어적 성질에 사로잡혀 그 요소들을 미술로 가져오는 작업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스승이었던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 또한 ‘Unspeakable’의 대체로 상위 언어의 존재를 주장했다가 비트겐슈타인의 비난을 받은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트겐슈타인의 문장을 여러 번 곱씹으며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비트겐슈타인은 분명 ‘말하지 말라(do not speak)고 하지 않았다. ‘침묵(silence)’하라고 하였다. 만일 침묵이 한 가지의 방안이라면, 비트겐슈타인의 말 속에 해답이 있다.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 해야 한다. 여기서 내가 지금까지 즐겨 사용해온 레퍼런스 몇 가지를 다시 떠올린다.

 

 

1. 가장 큰 것을 표현할 때는 가장 고요 해야 한다. (요한 요하임 빈켈만,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대)

2. 白居易(백거이)의 시구, “此时无声胜有声(침묵은 말보다 크게 말한다.)”

3. “귀에는 눈꺼풀이 없다”, “소리는 완전한 침묵에 이르지 못한다.” (파스칼 키냐르, 음악 혐오)

 

 

 

어쩌면… 회화는 음악보다 우월하다. 그 이유는 음악은 완전한 침묵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Vladimir Jurowski 1972~)가 시마노프스키(Koral Szymanowski 1882~1937) 스타바트 마테르의 합창에서 오히려 지휘봉을 내렸듯이[3], 숭고의 언어적 표현이란 불가능한 것, 오히려 침묵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회화는 침묵한다. 침묵 이야말로 가장 거대한 소리이다.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 ~ 1911)는 천인의 성가[4]를 세울 것이 아니라 침묵 했어야 하지 않을까. 침묵의 표현이야말로 완전한 비트겐슈타인적 회화의 완성일 것이다. 

 

그렇다면 침묵은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한자로는 “沉默”, 가라앉을 침()과 묵묵할 묵(默)을 사용한다. 말 그대로 묵묵함이 가라앉는 것이다. 가라앉는 것에 대한 표현은 헬렌 프랑켄탈러(Helen Frankenthaler, 1928~2011)의 물감을 온전히 천에 스며들게 만드는 기법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었다. 최근 동양의 멋에 푹 빠져 있는 나는 먹을 물에 희석시켜 캔버스에 스며들게 만들고 자연스럽게 번지는 형태를 이용한다. 마치 헬렌 프랑켄탈러의 ‘적시고 물들이기(Soak stain)’ 처럼 스며든 얼룩과도 같은 모습이다. 먹의 사용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데, 먹의 질감과 색상도 침묵을 표현하기에 충분히 적합하지만 가장 큰 계기는 침묵의 발음에 있다. 침묵(沉默)은 중국어로 [chénmò]라고 발음되는데 먹물의 먹(墨) 또한 침묵의 ‘묵()’과 같은 성조 4성의 []이다. 먹()과 묵(默)을 바꿔치기 해도 발음은 똑같은 [chénmò]로 사람들은 차이점을 인지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뜻은 가라앉는() 먹()이 될 것이다. 따라서 코팅되지 않은 캔버스 천에 먹을 스미게 하는 방식으로 가라앉음을 표현하는 것이 새로운 회화의 첫 번째 요소가 되었고, 침묵을 상징하는 오브제로는 발화 이전, 태초 코스모스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알(egg)의 형태를  차용하게 된다. 더해서 지금껏 본인의 대부분 작업에 등장했던 금(金)색 또한 가져오게 되는데 거기에는 동서양을 막론한 침묵과 금에 대한 속담[5]이 이유가 될 것이다. 이 모든 요소들은 여러 형태로 화폭 안에서 마치 풍경화를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조합된다. 이는 나의 회화의 모태가 "움직이는 샹들리에 시리즈(2019)"에서 무대 배경으로서 사용되었던 회화 작업들에 있기 때문이다.

마치 만담(相声)과도 같은 재미있는 말장난이 몇 가지 있다. 침묵은 소리가 없는 것인데 마치 무언가가 존재하는 것처럼 표현된다. 침묵 앞에는 주로 무겁다는 수식어가 붙는다. 침묵은 질량이 없는 것인데 어찌 모두가 무겁다 하는 것일까. 침묵의 질량감은 어찌 탐구 할 수 있는 것일까. 또한 침묵은 ‘깬다’라고들 한다.[6] 질량과 함께 깨어질 수 있는 fragile한 속성이 있는 것이다. 마치 알이 깨어지듯이.

침묵은 질량을 가진 것. 깨어지는 것. 그리고 금()의 것이다. 대칭적인, 그리고 반짝이는 것 또한 내가 작가로서 손에서 놓지 않는 요소들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라 했지만 정작 본인은 사석에서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부유하는 생각들과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곤 하였다. 이것이 내 회화, 그리고 설치가 가지고 있는 양가적인 성질이 아닐까….

 

 

[1] L. Wittgenstein, TLP 7

[2] L. Wittgenstein, TLP 7

[3] 05. 03. 2016에 방문했던 London Philharmonic Orchestra의 공연에서. Royal Festival Hall.

[4] 말러의 교향곡 제 8번이 천인 교향곡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5] 동양 : 沉默是金。침묵은 금이다.

      서양: 토마스 칼라일,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 (Speech is silver, silence is gold)

[6] (국문) 침묵을 깨다. (영문) Break the silence.

 

​김지민 26. 06. 2020

 

*

It took me a long time to realise that sublimity is always accompanied by the feeling of pain. All this far, I have confused the painfulness of the sublime with the feeling of nostalgia—a nostalgia for things that I have truly loved on which I have spent countless hours. But now I have come to know otherwise.

 

For instance:

- Gustav Mahler’s Symphony No. 8, known as “Symphony of a Thousand”

- André Gide’s writings

- Michael Angelo’s Pieta

 

It would be far too strained to claim that the feelings that I encounter from these works are solely joy and pleasure. There has always been something behind these positive feelings. My love for them has also distressed me--there has always been a choking poignancy that suffocates me.

Felix Mendelssohn describes this phenomenon as “schmerzhaft angenehme Empfindung”, the simultaneous feeling of joy and anguish. Listen to the Symphony no. 8 by Gustav Mahler. The storming choir consisting of one thousand people almost bores the sky and tears my heart apart. Read André Gide, his extremely restrained yet rapturing writings. They resemble the sound of prayers. Go to St Peter’s Cathedral to see the Pieta, with the face of Maria that is extremely calm and peaceful yet bearing the biggest grief of all. In Mozart’s opera “Don Giovanni”, the commendatore scene from Act II, when the Ghost comes down tearing walls and storms in anger: “Don- Gio-van – ni! A ce-nar te-co!”, it is a rather fearful moment, yet did you notice the mournfully soft and subtle tune that follows underneath, f – e – f – g ? In Beethoven’s famous Symphony no. 9, the part when “Ode to Joy” comes in, breaking the silence, have you seen the conductor, full of sweat, singing with the choir, conducting as if he will break his arms very soon, with a face full of joy, rapture, and at the same time terribly distorted with pain...

I seek to bring forth this combined feeling of joy and suffering, and to reveal the pain behind the sublime. 

JeeMin Kim 28. 10. 2019

“움직이는 샹들리에 Moving Chandelier” 연작은 2019년 런던 Horse Hospital Gallery의 전시에서 처음 시도하게 된 작업인데, 지금까지 변주를 거듭하며 그 형식을 주요 작업으로 이어 오고 있다.  이전까지는 설치 작업을 주 매체로 삼았고, 이 작업에서 처음으로 회화와 설치를 병치하는 시도를 하였는데, 그 작업이 가져온 무대적 분위기에 매료되어 이를 집중적으로 탐구하게 되었다.

 

“움직이는 샹들리에”는 본인의 성장 배경에 근거하여 서구 고전 문화를 향한 향수와 양가적 숭고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 되었다. 숭고의 특정한 감정을 유발하는 요소들을 콜렉션 형식으로 모아 무대적 설치 작품으로 이끌고 있다. 펠릭스 멘델스존이 ‘즐겁고도 괴로운기분(schmerzhaft angenehme Empfindung)’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적이 있는 바와 같이, 내게 숭고란 환희와 고통을 동시에 수반하는 양가적 감정이다. 이는 에드먼드 버크가 주장해온 불쾌에서 쾌로 전이되는 숭고와 일맥상통하기도 한다.  과거 본인의 성장 배경에 따라 서구 고전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것에서 나아가 역사적으로 식민 지배를 받았던 제 3세계 현대 여성의 입장에서 서양-동양 사이의 본인의 시대적, 문화적 위치를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호미 바바(Homi K. Bhabha)가 제안했던 문화적 혼성 공간을 참고하여 제국주의 국가 문화를 향해 우리가 갖는 기형적 노스탈지아를 이야기한다.

 

첫 움직이는 샹들리에를 설치했던 Horse Hospital Gallery 는 1797년 말을 위한 병원으로 지어진 곳으로, 당시의 흔적이 그대로 유지되어 있는 특수한 건축물이다. 당시 전시에는 샹들리에를 기계 장치로 움직이게 할 기술과 시간이 부족해 움직이는 샹들리에의 퍼포먼스를 영상으로 대체하고 전시장에는 “추락한 샹들리에 Fallen Chandelier” (죽음)을 설치하였다. 어둠이 깔린 낡은 벽돌 전시장에 추락해 산산히 부서진 샹들리에에 한 줄기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었는데 이 첫 연극적 시도에서부터 “움직이는 샹들리에” 시리즈는 장소특정성을 빼고 논 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옛 건축물에서 그 장소가 겪어왔던 역사적 맥락을 이용한 장소특정적 설치를 이끌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앞서 논의 하였던 역사, 문화적 하이브리드를 장소특정성에 결부시켜 새로운 환경을 구축한다.

 

“After all, the chandelier has always appeared to me as the principal actor, seen through the large end or the small end of the lorgnette.” (C. Baudelaire) "망원경인 오페라 글라스를 반대 방향으로 들어 졸보기처럼 사용한다 하더라도, 즉 어떠한 상황에서건 샹들리에는 내게 언제나주역 배우로 보였다.” (샤를 보들레르)

 

이 설치 작품에서 서구 고전문화의 산물이자 개인적으로도 큰 애착을 가지고 있는 오브제 샹들리에를 주제로 삼았다. 보들레르의<Journaux intimes>의 한 구절에서 그가 샹들리에를 극장의 주연 배우로 여겼듯이, 마치 무대처럼 꾸며진 배경 앞 샹들리에는 시리즈 별로각기 다른 움직임을 반복하며 narratives와 감정을 전달하는 공연 속 배우의 역할을 수행한다.

​김지민 02.09.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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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im of my research is to prove the potential linguistic function of art. In my previous works, I have attempted to expose the limits of natural language and to show how this boundary could be dissolved when art is recognised and employed as a form of language. I believe that art has the potential to become a grammatical language, by which the artist can transmit certain ‘unspeakable’ ideas. I also believe that the development of a practical method of communication in the language of art is possible, and I deeply aspire to be one of its developers.

Occasionally, after watching a great film, the afterglow dies out through the subsequent conversations: we cannot help but to come up with interpretations of the film, in the hope of finding a satisfactory and logical explanation of the director’s intentions and the deeper meanings embodied in the artwork. Susan Sontag calls this “the intellect’s revenge upon arts”. I have always felt an immense difficulty in explaining art in our natural language. Why does art have to be explained? Why do we always try to translate art into texts? It could sometimes be enough only with an artwork. Art itself certainly can convey to us information even beyond the limitation of our language. Could art be considered as a form of language? When people make conversation in daily life, we “know” the language to understand, not “interpreting” what others say. If we understand art itself as a language, with its peculiar grammars and unique expressive function, then it would be utterly superfluous and futile to explain or interpret an artwork.

My intention is to show that art is not a kind of artificial showmanship but an alternative language for us who have reached the limits of words. It is a language we have never studied or learnt, yet have embraced since our birth. It sometimes is more powerful and rather more forthright than our tongues. Socrates has suggested this ability of recognising language of art as a genius of artists. According to Plato, true artists are people who can discern the ideas conveyed in artworks just as we read ideas from a book. Moreover, most of the times they seem to be unaware of their ability to do so. We naturally absorb and acquire our native languages, and artists are no exception. In modern linguistics, the idea of ‘Universal Grammar’ (UG) advocated by Noam Chomsky states that the ability to acquire language is innate to every human being; we are born with the capacity to learn, comprehend and eventually use language. Analogously, I believe that each human being is endowed genetically with the innate capacity to develop a language of art, which has its own set of grammatical rules.

On conveying formless notions, human language is absurdly lacking and has its limits. Ludwig Wittgenstein, in his earlier work Tractatus Logico Philosophicus, claimed that natural language has a strict underlying logical structure, and draws the distinction between ‘sensible’ and ‘senseless’ propositions. According to Wittgenstein, only those propositions that correspond to possible state of affairs are meaningful. One implication is that only the things about the natural world can be meaningfully said; other things, such as art, religion, ethics and metaphysics, though they might have great importance to us human beings, are inexpressible in the sense that they fail to conform to the logical structure of natural language. He says: "No, not everything you desire to express in speech is expressible in speech: there is indeed the inexpressible in speech. The failure of your sweeping claim shows itself, and what you run up against in your failure is what we might call the mystical." Following Wittgenstein, many philosophers in the early 20th century began to hold the view that language is unsuitable for expressing elusive concepts. These philosophers thought that it was necessary to confine our language, so as to avoid ambiguities and confusions. I wish to advocate a new solution: instead of limiting our natural language, we use language of art to express these otherwise inexpressible things. Therefore art, the innate language, could be used instead to transcend the limits of ordinary language. Then the fundamental question is this: How could the transformation between metaphysical form and artistic language be made?

Langer has introduced the idea of a human as a “transmitter” and “transformer”. Within the process of an artist’s self-expression, an artwork is created as a result. This causes the percipient that reproduces an artist’s experience through art. A complicated psychological phenomenon operates between the creator of artistic language and the perceiver. Thus the relationship of the artist’s speaking situation and the response made from  the listener also is crucial, yet those two elements cannot be regarded in the same light. There is no certainty that our linguistic expression is also used by others with identical meanings that we have. An artwork is the best sign to find out about the artist’s internal experiences, yet it is extremely hard to draw the identical conclusion from others unless the creator speaks for him/herself. This as well is an irony of linguistic reproduction. If the artist and the listener fail to reach a consensus, how could we decide the correctness between those two? What is a successful conveyance? Is it necessary for the perceiver to gain the same result as the artist intended? Before understanding, ordinary language requires competence in a certain language. Artistic language might do as well for both the maker and the viewer. To make this perfect conveyance possible, it requires same level of capability for the receiver, as if we need to be fluent in French to understand French conversations. If all people have the same capability of understanding the language of art, then everyone would receive the same messages; that is to say, experience the same feelings that the artist attempts to express. However, I claim that the language of art is not a universal language; this innate language differs by individual artists. Therefore a successful conveyance can be achieved without an exactly the same understanding of the artist’s message; the level of understanding is to be compromised.

For practical works, I have been developing the methods of communicating metaphysical experiences. LPO Project, which I have performed as an installation work could be a piece of evidence. In this work, I have made the audiences to sit in a dark room with their eyes closed, and let them listen to Beethoven. A screen was projected in front of them. I used the fact that humans can actually detect light when their eyes are closed, more delicately than we expect. When we listen to music with our eyes closed, we always get to see a new kind of emotional painting in front of us. I have tried to deliver this elusive experience through the vision beyond their usual sight. Language and sound seem very different, yet they are in fact the same. Art, sight, and music: I believe all of these are essentially the same intangible language. My practical work until now has mostly been based on this idea. I gave, as an example, three types of artistic languages: poetic language, visual language, and sound language. In particular, I have tried to bring this sound language into artworks as I found the similarity of music and ordinary language very fascinating. The function of the language system is diverged greatly into vocal language and written language. This happens equally in music. Music is possible to be made into sound: the alphabets (notes) gather to make sentences and stories (music). It is also possible to write text (musical scores) as letter (notes).

What if I try to translate text into metaphysical form, instead of translating art into interpretation? As experiments, I have considered musical notes as alphabets. I have allocated a certain chord on each alphabet, and I have moved this into a manuscript paper. Astonishingly, when performed, it sounded like a proper work of music. To push this idea further, I have attempted several ways of making this music into installation work. I wanted to make this tune into a sound installation, but without any electronic equipment. The series of installations “Art as Language” with the shape of a Mobil consist of glass panels. Each glass piece is adjusted to represent each tune of the sentences. Glass panels (alphabets) create sound together (words), make sentences and eventually provide messages. 

JeeMin Kim 08 01 2018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에 있어 “Speakable"과 ”Unspeakable"이라는 두 가지 분류를 둡니다. “Unspeakable"은 말할 수 없는, 즉 인간 언어의 한계로서 소통이 불가능한 부분을 말합니다. 우리의 일상 언어는 의도를 전달하고자 하는 많은 부분에서 그 능력이 현저히 부족합니다. 찬반 논란이 언제나 존재했던 주제이지만, 예로부터 많은 철학자 혹은 예술가들이 시각 언어보다 음악 언어의 우월성을 주장 한 바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 언어 체계는 크게 음성언어 그리고 기록 언어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일상 언어와 음악 언어 사이의 흥미로운 공통점을 발견하였습니다. 음악은 소리로 표현됩니다: 알파벳(음표)들이 모여서 문장과 문단(음악)을 만듭니다. 또한 음악은 글로 쓰여질 수 있습니다: 글자(음표)들의 조합으로 텍스트(스코어). <Art as Language> 작업에서 각기 다른 음으로 조율된 유리 판넬들(알파벳)은 함께 부딪히며 소리(단어)를 만들고 음악(문장)을 만들 것입니다. 언어 철학과 예술 언어의 관계와 예술을 일상 언어의 수준에서 탐구 하였을 때, 이 예술 언어의 효과적인, 혹은 성공적인 소통 방법에 대한 고민을 담은 작품입니다.